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니토 무솔리니/생애 (문단 편집) == 몰락과 비참한 최후 == 이런 지리멸렬한 전과 탓에 이탈리아 국민은 베니토 무솔리니 체제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1943년에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뿐만 아니라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에 대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 무솔리니는 매도의 대상이 되었고, 파시스트 평당원들뿐만 아니라 [[로마 진군]] 때부터 함께했던 [[검은 셔츠단]] 동지들인 [[에밀리오 데 보노]], 디노 그란디, 체자레 데 베치와 무솔리니의 사위인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마저 등을 돌리고 무솔리니 해임 음모에 가담했다. 1943년 7월 24일,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는 치아노 장관과 디노 그란디 파시스트 최고평의회 의장의 주도로 무솔리니 탄핵 결의안이 19대 7로 통과되었고, 다음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탄핵 결의안을 추인하고 무솔리니를 해임했다. 후임 총리로는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가 임명되었다. 무솔리니는 매일 거듭되는 패전에 좌절하여 권력 의지를 완전히 잃었던 듯하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주 [[모르핀]]과 [[메스암페타민]]을 과다 복용했으며, [[샴페인]]과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국왕의 명령에 따라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 클라라와 함께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삿소(Gran Sasso) 산에 있는 '캄포 임포라토레' 산장에 연금되었다. 그런데 9월 12일 [[오토 스코르체니]] [[슈츠슈타펠|SS]] [[보병]][[대위]]가 지휘하는 SS와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합동 특공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호송했다. 이 작전은 '떡갈나무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스코르체니는 자신이 거느린 SS 소속의 프리덴탈 특수부대와 공군 공수사단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구성된 혼성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무솔리니가 연금된 [[호텔]]에 [[글라이더]]를 타고 돌입,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부대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스코르체니 휘하의 특수부대는 이탈리아에 올 때부터 전원 공군 공수부대원으로 위장했으며, 스코르체니를 지원하기 위해 아래쪽 골짜기와 [[케이블카]] 정거장을 장악한 지원부대는 진짜 공군 공수부대였다. [[글라이더]] 12기에 나눠 탄 특공대는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좁은 평지에 강행 착륙했다.[* 12기 중에 착륙에 성공한 글라이더는 8기뿐이다.] 이 산장을 경비하던 [[이탈리아 헌병군]] 1개 [[중대]]는 [[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밖에 없었지만 독일군의 습격에 저항했으나 스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 육군 장성 페르난도 솔레티 장군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독일 특공대가 산장의 통신실을 장악해 통신을 끊어버린 바람에 솔레티 장군의 거짓말을 확인하지 못해 결국 저항을 멈췄다.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Fi 156]]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친위대(나치 독일)|SS]] 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해 공수부대와 합류해 퇴출했다. 뒤이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공군]] [[야전]][[원수(계급)|원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이탈리아 주둔 [[독일 국방군]]을 동원하여 연합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나머지 이탈리아 북부 본토를 재장악하게 했다. [[파일:MussoliniEscape.jpg]] 탈출한 무솔리니.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밀라노]]에다가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살로 공화국)을 세우게 했다. 또 국가 파시스트당의 후신인 [[공화 파시스트당]]도 새로 창당하게 했다. 무솔리니는 먼저 [[국방장관]]에 [[로돌포 그라치아니]]를 임명했고,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손이 닿는 한 피의 복수를 감행하여 사위인 치아노와 [[에밀리오 데 보노]]를 비롯, 7명을 총살하였다. 디노 그란디만이 일이 글렀음을 알고 스페인 프랑코에게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하지만 치아노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무솔리니는 마지막까지 고뇌하였다. 독일 측은 반역을 저지른 치아노를 깨끗이 죽여 없애길 희망했으나, 지나치게 간섭해서 죽이라 말라고 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솔리니에게 맡겼다. 주 이탈리아 독일대사 란은 무솔리니가 사위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큰소리만 치는 것이 분명하니까 그냥 치아노를 스위스로 풀어주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1944년 1월, 치아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치아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자신을 죽이는 기쁨을 주지도, 자신의 죽음으로 영화를 찍는 사디스트 가학쑈를 벌이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독극물을 삼켰으나 독극물이 가짜라서 죽지 못했다. 이후 나머지 피고들을 위해 치아노는 마지 못해서 사면 요청서에 서명했으나, 이를 보고받은 군정장관, 법무장관, 내무장관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떠넘기면서 무솔리니에게 보고하지 않고 독단으로 이를 반려했다. 한편 무솔리니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을 서성이면서 치아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뉴스가 왔는지 계속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뉴스도 받지 못하던 와중에다가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또다시 받게 되자 무척이나 심란해져서 이탈리아 주둔 [[친위대(나치 독일)|SS]] 사령관 [[카를 볼프]] 장군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전화로 물었다. 무솔리니는 독일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전화는 독일어로 이루어졌다. 볼프 장군은 "치아노는 이탈리아 내정의 문제이므로 개입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무솔리니가 사내 대 사내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의견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만약 치아노를 죽이지 않으면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신뢰가 손상될 것이며, 치아노가 살아서 무솔리니를 계속 위협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무솔리니는 치아노에 대한 구명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치아노가 사면 요청서에 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된 무솔리니는 공화국 수반인 자신에게 사면 요청서가 보고되지 않은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또 치아노의 사형 집행 뉴스가 파시스트 국가 [[조비네차]]와 함께 보도되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불쾌해하면서 망자에 대한 예우도 없이 무슨 축제라도 벌이는 꼴이라고 심란한 마음을 드러냈다. 오토 스코르체니 자서전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딸 앞에서는 치아노를 반드시 총살할 것이라고 노발대발했으나, 뒤로는 독일군에게 총살 결정을 취소할 수 없는지 문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미 실권이 없는 상태였기에 총살을 막을 수 없었고, 치아노의 총살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자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코르체니의 자서전은 어디까지나 주워들은 것이 중심이라서 정확하지 않다. 여하간 무솔리니는 명목상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국가원수였지만, 괴뢰국에 불과한 입장에서 그에게 주어진 권리는 많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 30만에 이르는 구 이탈리아군의 석방도 거부했으며, 일부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무솔리니 실각에 가담했지만 연합군 진영으로 달아나지 못한 이탈리아군 장성이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무솔리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어도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도 독일군으로부터 소외되어 거의 후방 [[파르티지아노]] 진압에 종사했으며 그마저도 자신의 심복이던 ~~라고 믿고 있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후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며 [[이탈리아 전선]]의 전황이 악화하자 그는 국외 탈출을 꾀했다. 4월 초 연합군이 포 강 유역으로 쇄도해 들어왔고, 25일에는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가 총 궐기해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 도시들을 해방했다. 무솔리니는 밀라노를 벗어나 북부의 [[코모]](Como)로 탈출했다. 그의 주위에는 그간 일 두체(Il Duce)의 권력이 무색하게 소수의 검은셔츠 단원과 일부 파시스트 친위대만 함께했고, 살로 공화국군을 이끌던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사령부로 돌아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달아나 며칠 후 연합군에 항복했다. 다행히(?) 메나지오 마을에서 200여명의 독일군 행렬을 발견해 합류했지만. 이들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소속 방공부대였고, 이들의 임무는 독일본토로 탈출하는 것이지 무솔리니의 구출이 아니였다. 여하간 무솔리니는 독일 군복으로 갈아입고 스위스 국경에서 스위스 망명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메나지오 북쪽 10km지점 무소(Musso) 마을에서 매복하고 있던 [[파르티지아노|게릴라]]들에게 체포되었다. 전투 의지도 바닥이고 하루빨리 독일로 탈출할 생각이던 독일 방공부대는 무기를 놓지 않고 이탈리아를 빠져나가는 대신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을 게릴라에게 넘기는것을 택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게릴라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독일 군복을 벗으며 "독일은 이제 질렸어! 그들은 두번째로 날 배신했어!"라고 외쳤다 한다.] 이때 무솔리니는 트럭 뒤편에서 독일 군복을 입은 채 철모를 쓰고 웅크리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는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게릴라]][* [[빨치산#s-4.4|빨치산]], [[이탈리아어]]로는 '''파르티지아노'''라고 부른다.]들에게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해군 수병 시절 무솔리니에게 수훈한 사람이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무솔리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거나, 무솔리니가 신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이야기들일 뿐이고 무솔리니 본인 자체가 굉장히 아주 특징적으로 생겼다. 선이 굵은 얼굴형인데다가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흔히 그렇듯 집권기간 내내 자기를 우상화하는 면상 사진을 전국 곳곳에 걸어뒀기 때문에 모르기가 어렵다. 결국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힌 다른 측근들 그리고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즉시 총살당해 죽었다. [[베레타 M1934]] 자동권총 2정과 [[MAB 38|베레타 M1938]] 기관단총 1정에 의해 무솔리니의 신체가 벌집이 됨으로써 총살집행이 끝났다. 유언은 "그래도 잘 된 거야. 적어도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죽으니까 그나마 위안이군." 혹은 "내 가슴팍을 쏘아라!"였다고 한다. 다만 아예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한손에는 [[묵주]]를 꽉 쥐고있는 손이 벌벌 떨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유언의 신빙성에는 의문점이 있다. 미국 언론인 피터 톰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 베니토 무솔리니와 윈스턴 처칠이 교환한 서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고 처칠이 영국 정보부원 브루노 로나티와 로버트 마카로네에게 베니토 무솔리니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 실제로 1994년에 로나티도 자신이 무솔리니를 총살했고, 동료 마카로네가 무솔리니의 정부 페타치를 총살했다고 밝혔다. [[파일:Mussolini_e_Petacci_a_Piazzale_Loreto,_1945.jpg]] ----- 왼쪽에서 두번째가 '베니토 무솔리니'고, 무솔리니의 옆에 가운데 매달려 있는 사람이 그의 [[정부(관계)|정부]]인 [[클라라 페타치]]다. [[파일:Nicola_Bombacci_3.jpg]] * 니콜라 봄바치(Nicola Bombacci, 1879. 10. 24. ~ 1945. 4. 28.) : 청소년기에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1921년에 15인 중앙위원회로 구성된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 멤버가 되었으나 후에 변절하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공화당인 파시스트 정당의 간부로, 무솔리니를 충성스럽게 지지하였다. 그러다가 파르티잔군에게 붙잡혀 처형될 당시 '''"영원한 두체 무솔리니! 영원한 사회주의!"'''라는 유언을 남기고 총살되었다. * '''[[베니토 무솔리니]]''' * '''[[클라라 페타치]]''' [[파일:Alessandro_Pavolini_(cropped).jpg]] * 알레산드로 파볼리니(Alessandro Pavolini, 1903. 9. 27. ~ 1945. 4. 28.) : [[정치인]]뿐만 아니라 [[극우파]] 언론인, 수필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2년에 이탈리아-[[아비시니아]] 전쟁에 참전해 [[갈레아초 치아노]]가 이끄는 비행대대의 중대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 후 1939년에 무솔리니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어 1943년 1월까지 일하였다. [[파일:Achille_Starace.jpg]] * 아킬레 스타라체(Achille Starace, 1889. 8. 18. ~ 1945. 4. 29.) : '''"무솔리니가 [[신]]이다!!"'''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 [[왕당파]]의 일원. 1920년 [[트렌토]]의 [[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고 곧 그의 눈에 띄어서 지역 정치비서가 되었으며 [[국가 파시스트당|국가 파시스트 정당]]의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2년이 되자 국무장관으로 승진하였다. 1935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참가하여 북부 전선에서 싸웠고 1936년 2월 29일에 벌어진 [[샤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사진에서는 짤렸지만 맨 왼쪽 매달린 사람 옆에 두 명이 더 매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매달린 사람은 총 7명이다. 총살당한 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시체는 애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 그리고 측근들의 시체 3구와 함께 밀라노로 인도된 뒤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당시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반쯤 완공된 [[엑슨모빌|스탠더드 오일]] 주유소의 기둥[* 현재는 [[맥도날드]] 지점이 [[https://maps.app.goo.gl/uYbxqxb3s4YLC7A28|들어서 있다]].]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 광장은 반파시스트 게릴라와 시민을 처형한 장소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4년 8월 10일 ] 그들의 시체에는 원한을 품던 시민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거나 총으로 쏘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 같은 분노는 무솔리니의 시신에 특히 집중되었다. 주유소에 매달리기 전부터 시민들의 발길질에 차인 무솔리니의 얼굴은 심각히 훼손되었다. 게다가 주유소에 매달린 클라라 페타치의 치마는 뒤집혀서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시민들은 클라라의 중요 부위에 이물질을 집어넣거나 막대기 등으로 쑤셔박기도 하였다.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어느 노파가 치마를 여며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넣어 줬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 = 자신의 소신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다.]라는 관용어가 생겼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큰 충격에 빠졌다. 무솔리니가 총살당하고 이틀 후에 히틀러는 자살할 때 내 시체를 불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도 무솔리니처럼 죽어서 시체가 저런 꼴이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결국 히틀러는 그가 바란대로 죽은 뒤 화장되었다. [[도조 히데키]] 역시 무솔리니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끔찍한 처형을 피하고 싶었던 도조는 [[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판결대로 처형당한다. 이후 유가족들은 몰래 시신을 회수하였고 아무도 모르게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 가문 무덤에 안장시켰다. 한동안 증오하던 몇 시민들에게 석관이 훼손당하기는 했어도 도난 또는 멸실되지는 않고 무사히 남은 탓에 저 무덤은 보수된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극우파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어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redappio%2C_cimitero_di_san_cassiano%2C_cripta%2C_tomba_di_benito_mussolini_04.jpg|width=100%]]|| || 베니토 무솔리니의 묘지 || 두상이 [[로마 황제]]의 두상을 본뜬 듯 근엄한 표정이다. 두상 양쪽에 있는 파시스트의 상징인 [[파스케스]] 조각이 인상적이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베니토 무솔리니, version=876)] [[분류:베니토 무솔리니]][[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